제2회 센텀이루다 스토리 공모전 최우수 당선작
- 작성일 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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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 오늘 내리는 단비와 같이 여러분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줄 따듯한 이야기, 『제2회 센텀이루다 직원스토리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에 당선된 김희정 복지실장님의 글, 지금 소개해 드립니다!
엿 먹이고 싶은 이야기
2019년이 스러져가고 있다. 그리고 2020년의 2019년은 회자됨으로써 다시 살아난다.
이 이야기를 시작함으로 인해서 지금은 고인이 된 그 분을 다시 모셔오는 기분으로 조심히 타이핑을 시작한다. 진정한 죽음은 기억에서 사라질 때라는 인디언 속담이 있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서만큼은 다시금 소생하여 숨처럼 내뱉고 싶은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2011년 10월. 입사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나에게 항상 호박엿을 던져주시던 환자분이 계셨다. 챠트번호 62번.
마른 체격에, 엉성한 머리숱이셨지만 소위 젊은 시절엔 꽤나 다부진 생활을 하셨을 것만 같은 그 분은 항상 환의의 양 주머니 가득 볼록하게 호박엿을 챙겨오셨다. 그리고 재활치료를 위해 들어서는 5층을 지나실 때마다 인사하는 나를 향해 ‘엿 무라!’ 하며 엿을 주시곤 했다. 툭 하고 던지듯 주시는 엿을 주워 ‘아니 엿 먹으라뇨, 아버님ㅋㅋㅋ’하며 깔깔대는 그런 나에게 매일같이 엿을 던지셨다.
엿을 던져주시는 거리가 한 뼘 한 뼘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분의 만족스러움도 높아지시는 듯 했다. 한번씩 던져주신 엿에 머리라도 콩 맞을 때면 그날 그분의 모습은 생일이라도 맞은 표정이셨다. 한번은 엿을 주시지 않자 왜 엿 안 던져주시냐고 여쭤보니 다 드셨다는 말에 다시 던져주시라고 호박엿 한 봉지를 사다 드리기도 했다. 던져주는 호박엿을 줍고 웃는 걸 바라보는 일은 나에게 소소한 재미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 분은 치료가 끝난 후면 자주 데스크 앞으로 오셔서 아들에게 전화 요청을 부탁하시곤 했다.
아버님의 부탁으로 꽤나 자주 아들의 전화번호를 눌러댔던 것 같다. 처음에는 조끼 한 벌 가지고 와 달라는 부탁, 언제오냐는 말들, 수화기 너머로 부서지듯 들려오는 아들의 왕왕 거리는 음성들...그렇게 자신만의 느린 궤도를 그리시며 지내시던 중 뇌경색이 재발되어 시술 후 다시 돌아오셨다. 지팡이 대신 휠체어에 실린 몸으로, 어눌했던 발음은 좀 더 형체가 없어진 채로 말이다.
이후에도 아들에게 전화를 해달라고 찾아오시곤 했다. 찾아오시던 모습과 익숙한 듯 수화기를 건네드리는 건 여전했다. 다만 통화 내용이 ‘죽고 싶다. 퇴원하고 싶다’ 로 바뀐 것 말고는..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5층 원무데스크 앞에서 뵙지 못했다. 데스크 앞으로 보내달라는 요구조차 힘겨울 만큼 일상이 어려워지신 듯하다.
그렇게 그 분은 이전에 머무르시던 8층 셀프병실이 아닌 6층에서 고도의 간병을 받으며 지내셨다.
6층에서 공연을 할 때면 공연 중간에 아버님이 계신 병실에 급습하였다. 문을 빼꼼 열고 들어서면 항상 한 쪽 팔을 접어 팔베개를 하고 계시다가 팔을 풀어 손을 건네셨다. 그렇게 건넨 손으로 힘주어 쥔 악수가 우리의 인사였다. 재발하시기 전부터도 악수를 할 때면 손힘이 좋으셔서 놀라곤 했다. ‘우와 아버님 손힘이 왜 이렇게 좋으세여~ 내 손 없어지겠넹’ 하면 더욱 힘주어 쥐는 아버님이셨다.
가끔 놀러간 병실에서 그 날 공연한 동영상도 보여드리고, 아끼는 하늘 메모지도 붙여드리며,,,가끔이었지만 갈 때마다 사진첩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드리곤 했다. 유독 정이 갔던 이유는 오래 같은 곳에 있었다는 사실 외에도 그 분의 얼굴에서 아빠가 그려졌기 때문이다. 왜인지 모르게 아빠가 나이가 더 많이 드시면 저런 웃음과 분위기가 닮아있을 것 같은...그래서 아빠에게도 이야기를 드리곤 해서 ‘엿 무라 할아버지’라고 하면 대번에 알고 계신다.
그리고 얼마 후인 2019년 10월 14일.
그 분의 부고소식을 알게 되었다. 하루 지난 다음날, 원무데스크 앞에 서있는 장남의 모습을 보고서 정-말 오랜만에 오셨네, 하던 나에게 사망진단서를 건네는 동료를 보고서야 그 분의 사망을 알게 된 것이다.
부고를 듣고 이상하게도 슬픈 감정이 왈칵 하고 준비된 듯이 올라오지는 않았다. 업무가 바뀌게 되면서 한 차례 건너 뒤늦게야 알게 된 죄책감과 믿기지 않는 마음이 동반했다. 다른 이름을 듣듯 낯설게 반응하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 이상했다. 아직까지도 그 기분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잠깐의 발걸음. 나의 착각일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기다리셨을 것만 같아 내일 또 올께요, 해놓고 이주가 다 되도록 찾아가지 못한 것이 내겐 너무 죄송한 일이 되었다.
지나치게 하얗던 손등과 그에 비해 붉었던 큰 손바닥. 마지막 악수를 했을 때에도 손마디가 저려올 정도로 꽉 쥐어주셔서 괜찮으신 줄만 알았다. 나의 관심이라고 내세운 악수는 그마저도 무지하여 그분의 약해져가는 생명을 방관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분을 회상하며 두 무릎을 세우고 그 사이로 얼굴을 묻고 있으면, 그 사이에서 느껴지는 고요함에서 그 분의 환영이 보이는 듯하다. 그 아련하고 시린 마음을 묻은 굽은 등인지라_ 혹여나 등을 펴면 그 느낌마저 상실해버릴까 쉽사리 등도 펴지 못하고 웅크려 회상해본다. 이미 세상을 떠나 어떻게든 채워지지 않을 그 빈 자리에 마지막 모든 기억을 불어넣어 잠시라도 살아있게 해본다.
부고 소식을 접할 때면 항상 연관되는 장례식은 장례대행업체광고로만 보아왔던 어린 시절의 나에서, 이젠 검은 옷 한 벌 쯔음은 탈의실에 미리 개어둘 정도의 나이가 되어있다. 스러져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상을 느끼고,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눈물이 필요할지도 아는 나이이지만 어쩌면 우리병원의 생리 상 죽음을 마주하는 일이 드문 경우라 아직은 상처에 닿은 에탄올과 같은 따가움이 있다. 회상하며 글을 쓰는 내내 아직은 죽음에 예민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게 느껴지는 하루이다.
2019년의 끝에서 들려드린 엿 먹이고 싶은 이야기.
나에게는 그 엿이 그 분과 나의 추억의 전부를 뜻하는 일체이다. 그 분을 회상하는 지금의 나에게 호박엿을 건네 엿을 먹이고 싶었다. 충분히 애도하고 충분히 추억하기 위해서. 엿을 던져주시던 그 분의 증발된 시간들이 그립다.
- 고(故) 김0성님의 명복을 빕니다.
오늘과 같이 비오는 오후에 잘 어울리는 글이었습니다. 김희정 실장님에게는 고 김0성 아버님을 떠오르게 하는 매개체가 호박엿이었네요. '엿먹어라'는 어감과 달리 저도 엿에 관한 조금은 특별하고도 따듯한 기억이 있습니다. 포스팅을 하던 중 필자는 주제와 상관없이 '엿 먹어라'는 왜! 언제부터? 욕이 되었는지 급 궁금해졌는데요ㅎㅎ 그래서 찾아보았습니다!
고것을 알려주마 '엿 먹어라'의 유래
엿 먹어라는 왜, 언제부터 욕이 되었을까요?
1960년대 그 당시에는 중고등 및 대학입학 시험이 정말로 치열했다 합니다. 1965년도 전기 중학입시의 공동출제 선다형 문제로'엿기름 대신 넣어 엿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언가?' 가 출제되었는데요.
1)디아스타제 2)꿀 3)녹말 4)무즙 중 답은 1번 디아스타제였는데, 문제는 4번 무즙도 답이 된다는 것이 이 사건의 발단이 됩니다. 무즙을 답으로 써서 1문제 차이로 떨어진 학생의 학부모들은 난리가 났죠. 학부모들은 이 문제를 법원에 제소하기로 하고, 먼저 입시담당 기관에 항의를 하였으나 항의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합니다.학부모들은 무로 엿을 만들어 입시와 관련된 기관에 찾아가 엿을 들이대며 '무즙으로 만든 엿을 먹어보라'고 소리치면서 "엿 먹어라! 이게 무로 쑨 엿이다! 빨리 나와 엿 먹어라! 엿 먹어!"라고 항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당시 서울시 교육감, 문교부차관 등이 사표를 내고 6개월이 지나 무즙을 답으로 써서 떨어진 학생 38명을 정원 관계없이 경기중학등에 입학시켰다고 합니다. 그 후 '엿 먹어라'가 욕이 되었다 합니다. (▲사진은 19665년 3월 30일자 신문에 나온 기사)
여기서 놀란건 무즙으로 엿을 만들 수 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이 말이 정말로 팩트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입니다 ㅎㅎ
잔잔한 감동에서 시작한 오늘의 포스팅은 가벼운 웃음으로 마무리합니다.
특별한 재활치료가 필요한 몸과 마음을 위해, 진정한 치료와 치유가 일어나도록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센텀이루다재활요양병원이 되겠습니다!